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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역사이야기</title>
		<link>http://origanalco.info/</link>
		<description>역사이야기</description>
		<language>ko</language>
		<pubDate>Tue, 16 Jun 2009 18:03:56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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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단군신화에대하여</title>
			<link>http://origanalco.info/7</link>
			<description>&lt;P&gt;단군신화에대하여&lt;/P&gt;
&lt;P&gt;단군이야기는 역사입니다. 단지 그 역사가 &#039;누군가에&#039;의해서 &#039;신화&#039;로 바뀐 겁니다.&lt;/P&gt;
&lt;P&gt;단군신화의 이야기는 &#039;일제&#039;때 &#039;이병도&#039;라는 친일 역사학자에 의해 대부분이 말도 안되게 바뀐걸로 알고 있습니다.&lt;/P&gt;
&lt;P&gt;첫번재로 하느님이라고 전해지는 신과 가까운 존재인 환인과 환웅 입니다.&lt;/P&gt;
&lt;P&gt;그 환인과 환웅이라는 사람은 사실은 신의 이름이 아니라 &#039;직위&#039;의 이름입니다. 다시 말하면 어떤 나라의 왕을 &#039;환인, 환웅&#039;으로 불렸다는 말입니다. 우리나라는 옛부터 &#039;하늘&#039;을 숭배하는 집단이었습니다. 때문에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전해진 환인과 환웅은 역사에 넣은 것이죠.&lt;/P&gt;
&lt;P&gt;엄연히 따지면 환인과 환웅은 고조선전에 있었다고 전해지는 나라의 제왕이었습니다.&lt;/P&gt;
&lt;P&gt;또한 환인과 환웅 역시 틀린 표현입니다. 우리나라 식대로라면 &#039;한인,한웅&#039;으로 불려야 제대로 된 것이라고 합니다.&lt;/P&gt;
&lt;P&gt;고조선 전에 하늘나라, 즉 한국(桓國)이라는 나라가 있었습니다. 여기서 한국은 대한민국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 하늘나라-&amp;gt;한나라-&amp;gt;한국 ... 이런식으로 점차 시대가 변하면서 한자식으로 바뀐 표현입니다.&lt;/P&gt;
&lt;P&gt;그 때의 제왕이 &#039;한인&#039;이었습니다. 한인은 총7대에 걸쳐서 하늘나라를 다스렸다고 전해집니다. 지금의 바이칼 호수 부근을 중심으로요.&lt;/P&gt;
&lt;P&gt;또 하늘나라의 마지막 7대 한인, 지위리에게는 서자(첩에서 나은 자식)이 있었는데 그에게 천부인(우리나라 고대에서 전해지는 세가지 보물, 용경(용의 비늘로 만든 거울), 황검(봉황의 깃털로 만든 검), 맥고(맥이라는 신수의 가죽으로 만든 북)세가지를 물려주며 &#039;홍익인간&#039;의 뜻으로 나라를 다스리라고 명을 내렸습니다. 이에 지위리의 서자 &#039;거발한&#039;이 동방의 민족을 구제하기 위해서 흰머리산, 즉 백두산 부근으로 갔습니다. 이때 자신을 따르는 수하들을 거느리고 갔는데 그 것이 풍백, 우사, 운사입니다.&lt;/P&gt;
&lt;P&gt;우리나라 신화에서는 풍백, 우사, 운사를 신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풍백은 바람은 다스리는 신, 우사는 비를 다스리는 신, 운사는 구름을 다스리는 신. 으로 표현되고 있지요, 하지만 정확히 표현하면 풍백, 우사, 운사는 그 때 당쉬의 직위중하나였습니다.&lt;/P&gt;
&lt;P&gt;풍백은 &#039;치우&#039;씨가 맡고 있었고 운사는 &#039;신지&#039;씨의 원류일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다만 우사는 마땅한 기록이 없지요.&lt;/P&gt;
&lt;P&gt;이 중 풍백인 &#039;치우&#039;씨는 우리가 알고 있는 &#039;치우천왕&#039;의 선조입니다. 다시 말하면 2002년 월드컵 당시에 있었던 붉은악마의 마스코트 치우천왕이 우리의 선조일 가능성이 있다는 뜻입니다.&lt;/P&gt;
&lt;P&gt;운사 &#039;신지&#039;씨는 바로 신지혁덕을 말합니다. 혹시라도 이름을 들어보셨을 지 모르겠지만.. 신지혁덕은 최초의 글자로 알려진 &#039;녹두문&#039;을 만든 사람입니다. 녹두문은 한자의 원형으로 알려져 있습니다.&lt;/P&gt;
&lt;P&gt;여하튼 지위리 한인의 아들 거발한이 풍백, 우사, 운사를 데리고 그 밖에 3000명의 식솔을 이끌고 동쪽 흰머리산(백두산)에 정착해 나라를 세웠는데 그 곳이 고조선 전에 있었다고 알려진 배달국입니다.&lt;/P&gt;
&lt;P&gt;배달국의 왕을 &#039;한웅&#039;으로 불렀습니다.&lt;/P&gt;
&lt;P&gt;아마 신화속에 나오는 환인과 환웅은 바로 이들을 말하는 것일 겁니다.&lt;/P&gt;
&lt;P&gt;또 곰과 호랑이가 마늘과 쑥을 먹어 인간이 되었다는 말은...&lt;/P&gt;
&lt;P&gt;당시 한웅이 이 땅에 도착했을 때에는 곰을 숭배하는 웅족과 호랑이를 숭배하는 호족이 있었습니다.&lt;/P&gt;
&lt;P&gt;그런데 한웅은 그 중 곰족을 자신의 백성으로 만들고 호족을 쫒아냈습니다. 아마 이 이야기가 곰과 호랑이가 쑥과 마늘을 먹어 인간이 되었다고 하는 것일 겁니다.&lt;/P&gt;</description>
			<category>고대역사</category>
			<category>단군신화에대하여</category>
			<author>(이슬)</author>
			<guid>http://origanalco.info/7</guid>
			<comments>http://origanalco.info/7#entry7comment</comments>
			<pubDate>Tue, 16 Jun 2009 11:32:21 +0900</pubDate>
		</item>
		<item>
			<title>천추태후와 고려시대</title>
			<link>http://origanalco.info/6</link>
			<description>&lt;P&gt;천추라는 이름은 천추전에서 유래되어 자신이 스스로 왕후가 아닌 천추태후라고 부르도록 하였고, 외가성인 황보씨를 썻으며, 헌애왕후(964-1029)라고 알려져 있습니다.&lt;/P&gt;
&lt;P&gt;5대 경종의 3비 로써 아들을 낳게 되는데 그아들이 후에 7대 목종이 됩니다.&lt;/P&gt;
&lt;P&gt;5대 경종이후 고려왕실은 왕위를 계승할 왕자 부족으로(경종사망시 아들2살이었음) 경종은 4촌 동생인 성종(6대)에게 왕위를 계승합니다.&lt;/P&gt;
&lt;P&gt;성종도 아들을 얻지못해 결국&amp;nbsp; 경종(5대)과 헌애왕후(3비,천추태후)의 아들 목종(7대) 에게 물려줍니다. 하지만 목종은 단한명의 자식도 얻지 못합니다. &lt;/P&gt;
&lt;P&gt;당시 왕족중에 근친을 통해 아들을 낳은사람은 왕욱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왕욱의 아들 왕순(8대 현종)은 경종(5대)의 4비인 헌정왕후(3비 헌애왕후의 친동생)의 불륜관계의 씨앗으로서 왕위계승까지 헌애왕후의 걸림돌이 됩니다.&lt;/P&gt;
&lt;P&gt;고려라는 나라의 역사는 100% 단정 할수 없습니다.&lt;/P&gt;
&lt;P&gt;지금 현존하는 역사적 자료가 임진왜란으로 인해 충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lt;/P&gt;
&lt;P&gt;당시 왕족간의 근친은 일상이었으나, 불륜이나 간통은 지금과 같이 문제가 되었습니다.&lt;/P&gt;
&lt;P&gt;여기서,&amp;nbsp; 헌애왕후를 바라보는 중요한 시점중에 하나는 유교사상입니다.&lt;/P&gt;
&lt;P&gt;고려사중 유학정치이념을 실현하신분은 6대 성종(960-997)입니다.&lt;/P&gt;
&lt;P&gt;성종은 충효사상과 계급질서 확립을 주력함으로써 무반과 문반,평민,천민의 구분을 명확히 하고 중앙집권체제와 3성6부제,12목설치,지방조직정비,&lt;/P&gt;
&lt;P&gt;거란과 외교적성과로 인한 강동6주를 얻어 영토 확장등 많은 업적을 남긴 분입니다.&lt;/P&gt;
&lt;P&gt;(강동6주하면 서희장군이 유명합니다.)&lt;BR&gt;&amp;nbsp;&lt;/P&gt;
&lt;P&gt;이제부터 헌애왕후(천추태후)의 역사적기록을 토대로 보충해드립니다.&lt;/P&gt;
&lt;P&gt;7대 목종이 어린나이(18세)에 왕이 되자 헌애왕후는 왕권과 정치에 간섭을 합니다.&lt;/P&gt;
&lt;P&gt;여기서 헌애왕후의 내연남으로 김치양이 등장을 합니다.&lt;/P&gt;
&lt;P&gt;김치양은 성종왕위때 천추궁(헌애왕후의 궁,천추전)을 출입하며 헌애왕후와 정을 통하다&lt;/P&gt;
&lt;P&gt;장형을 당하고 성종이 귀양을 보내 버립니다.&lt;/P&gt;
&lt;P&gt;정권을 거머쥔 헌애왕후는 김치양을 불러들여 간통으로 아들을 가지게 됩니다.&lt;/P&gt;
&lt;P&gt;김치양을 불러들인 헌애왕후는 스스로 천추태후라 칭하고, 김치양에게 몇년만에 임면권(벼슬 인사권)을 주게 됩니다.&lt;/P&gt;
&lt;P&gt;이로 인해 목종은 왕권에 관심을 잃어버리고, 남색에 빠지며 문란한 생활을 보냅니다.&lt;/P&gt;
&lt;P&gt;기록에 의하면 목종이 김치양을 밀어내기위해 몇번 시도를 했지만 자신의 모인 헌애왕후에의해 실패했다고 합니다.&lt;/P&gt;
&lt;P&gt;또, 김치양과 헌애왕후의 사옥을 짓기 위해 백성을 강제 노역시켰으며 벼슬을 얻기위한 엄청난 뇌물이 김치양에게 들어갔고, 300간이 넘는 집에 살았다고 합니다.&lt;/P&gt;
&lt;P&gt;후에 현종이 왕위를 계승하는 과정을 찾아보신다면.&lt;/P&gt;
&lt;P&gt;(헌애왕후)천추태후라는 인물에 대해 더 알수 있습니다.&lt;/P&gt;
&lt;P&gt;고려사에서는 선대왕인 선종의 유교사상에 어긋나며, 왕권과 정치욕이 과했던 비라고 씌여져 있습니다.&lt;/P&gt;
&lt;P&gt;목종에 이어 김치양사이에 난 아들을 왕위 계승을 위해 걸림돌이었던 조카 왕순(대량원군)을 출가를 시켰고, 그후 독살, 암살등을 시도하였고, 결국 헌애왕후를 몰아내기 위한 세력인&lt;/P&gt;
&lt;P&gt;강조에 의해 목종은 살해되어 자살로 위장이 됩니다.&lt;/P&gt;
&lt;P&gt;그뒤 강조는 현종을 책봉하였으며, 헌애왕후는 귀양을 갑니다.&lt;/P&gt;&lt;BR&gt;</description>
			<category>고려시대</category>
			<category>천추태후와 고려시대</category>
			<author>(이슬)</author>
			<guid>http://origanalco.info/6</guid>
			<comments>http://origanalco.info/6#entry6comment</comments>
			<pubDate>Tue, 16 Jun 2009 11:32:14 +0900</pubDate>
		</item>
		<item>
			<title>잃어버린 한국고대사, 왜왕조(倭王朝)</title>
			<link>http://origanalco.info/2</link>
			<description>&lt;P&gt;다음 지식인에서...잼있는 글이 있어서 올려드립니다.&lt;BR&gt;삼국역사에 대한 새로운 생각인가 같은데...한번 읽어 보세요..ㅎㅎ&lt;BR&gt;&lt;BR&gt;잃어버린 한국고대사, 왜왕조(倭王朝)&lt;/P&gt;
&lt;P&gt;― 우리나라가 일본과 한일고대사 논쟁을 벌일 때는 임나일본부의 존재를 가정(假定)으로라도 먼저 받아들여야 한다&lt;/P&gt;
&lt;P&gt;우리나라와 일본 간의 고대사 논쟁은 끝이 없을 것 같기만 하다. 우리나라는 고대에 일본을 지배했다고 일본은 한반도에 임나일본부를 두었다고 서로 주장한다. 서울대학교 경제학과 어느 교수는 자기의 전공을 제쳐놓고 백제가 일본을 지배했으며 일본 천황은 백제인이었다는 논문을 써서 세계 역사학계에 발표했다고 한다. 한일간의 고대사 문제가 양국의 역사 전문가뿐만 아니라 국민의 관심사 속에서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lt;/P&gt;
&lt;P&gt;양국은 한 치의 양보도 없어 논쟁이 끝이 날 것 같지가 않으니 잠깐 세계 역사학계 쪽으로 시선을 돌려보기로 하자. 그런데 세계 역사학계 쪽으로 시선을 돌리면 우리는 절망감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세계 역사학계에서는 일본 쪽 주장을 수용하고 있는 것이다. &lt;/P&gt;
&lt;P&gt;놀랍게도 우리나라에서 출판된 ‘대세계사’ 책에서조차 고대에 일본이 한반도에 임나일본부를 두었다고 쓰여 있다. 물론 그 책의 역자가 세계 역사학계의 한일 고대사 부분을 그대로 베꼈기에 그렇게 된 것이리라. 언젠가 영국 이코노미스트지에서, 지금까지 외래세력에 의해서 지배된, 굴종의 역사만 갖고 있는 한국이 처음으로 세계를 향하여 뻗어 나가기 시작했다고 보도했다. 그 기사는 세계 역사학계의 한국사 부문에 의거하여 쓰였음에 틀림없다. 백제가 일본을 지배했으며 일본 천황은 백제인이라는 앞의 서울대학교 교수의 논문이 인정을 받았다고 하는데, 사실은 세계 역사학계에서 인정을 한 것이 아니라 흥미를 보여준 것에 불과했던 모양이다. 한국의 역사학자들이, 경제학과 교수까지 나서서, 그토록 분투하였는데 결과는 그러한 것이다. &lt;/P&gt;
&lt;P&gt;그러나 한국이 이십 세기에 들어와 사상 처음으로 세계를 향하여 발돋움한 것은 결코 아니다. 백제, 신라는 동방의 로마제국이었다. 세계역사학계에 한국 고대사의 진실을 알려주어 수용하게 하는 일이 시급하다. 한국의 역사학계에는 이제라도 발상의 전환을 하고 논쟁 방식을 재검토하는 일이 절실한 것 같다. &lt;/P&gt;
&lt;P&gt;한일간 고대사 논쟁에는 현재 우리가 절대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나서야 한다. 논쟁에는 대폭적인 양보도 때로는 필요한 것이다. 중국과 고구려사 논쟁을 벌일 때는 고구려인의 구십 퍼센트가 중국에 흡수되었다는 전제도 과감하게 수용해야 한다고 하였다. 전제는 어디까지나 가정(假定)이며 중요한 것은 결론이다. 일본과 고대사 논쟁을 할 때는 중국과의 논쟁의 경우처럼 전제를 대폭적으로 양보하여 수용하고 나서야 한다. 칠지도는 백제왕이 일본왕에게 바친 것이며 한반도에 임나일본부가 있었다는 일본 측 주장도 때로는 과감하게 가정으로 수용하면서 논쟁을 벌여야 한다. &lt;/P&gt;
&lt;P&gt;십몇 년 전의 일이다. 필자가 서점에서 이런 저런 책을 뒤척이다가 큰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한국어는 우랄 알타이어가 아니라 남방 인도계 언어(길약어)라고 어느 국문학자가 밝힌 것이다. 필자는 초등학교 때부터 우리 민족은 몽골계 족이며 우리말은 우랄 알타이어 계통이라고 반복적으로 교육을 받아 그것이 이미 피와 살이 되다시피 하였기에, 우리말이 남방 인도어계라는 그 학자의 견해에 대해서 그때 강한 반발감이 일어났다. 그런데 놀랍게도 관변 국어학계에서 벌써 그 학자의 견해를 수용하였다는 것이었다. 필자보다 백배나 완고한 관변 학자들이 수용했다니 필자로서는 수용하는 것 외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 때의 충격은 자신의 조부(祖父)가 친조부가 아니라 의붓이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의 그것과 같은 것이었다.&lt;/P&gt;
&lt;P&gt;‘그러고 보니 한글이 인도 어느 소수 민족의 글하고 거의 같다는 신문보도를 본 적이 있다. 그렇다. 한국어는 우랄알타이어가 아니라 남방 인도계어였으며 한국민족은 몽골계 단군 부여 족이 아니라 남방인도계 족이었던 것이다.’&lt;/P&gt;
&lt;P&gt;물론 국가 민족에게 생물학적인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정신문화적인 것이다. 한국의 정신문화는 몽골계 단군조선, 부여 고구려의 정신문화를 이어 받은 것임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러나 필자는 그때까지 한국은 생물학적으로도 몽골 단군조선 부여 계통이라는 것을 철석같이 믿고 있었던 관계로 그때 받은 충격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한국 고대사에 관해서 밑바탕부터 다시 생각해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lt;/P&gt;
&lt;P&gt;한일 고대사를 지금까지와는 다른 차원에서 살펴보기로 하자. 고대에 남방 인도계 사람들이 한반도와 일본 땅에 들어와 나라를 세웠다. 일본이 땅이 더 크고 기름지다고 해도 당시 지정학적으로 열등한 지역일 수밖에 없다. 한반도인이 곧 일본지역인을 지배했을 것이다. 물론 그들은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같은 민족이었다.&lt;/P&gt;
&lt;P&gt;그래서 한국과 일본에 걸친 통일 왕조가 있었다. 왜(倭)는 사실은 일본국이 아니라 한일간에 걸쳐있는 왕국이었던 것이다. 물론 관료체제가 아닌, 원시적인 왕국이었을 것이다. 일본 지역은 여자 제사장이 지배했던 것 같다. 그에 대해서는 이미 국내외의 많은 역사학자들의 연구논문들이 나와 있다. 어느 일반인이 그에 대해 연구하여 신문에 발표한 것도 필자가 언젠가 본 적이 있다. 단지 그 사람은 그 왕국을 왜라고 안하고 가락국이라고 하였다. 한일간에 걸친 왕국인 왜의 존재에 대한 연구는 일본 학자들에 의해서도 이루어졌다. 그런데 한일 양국의 주류(主流) 역사학자들은 그것을 여전히 인정하지 않고 않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lt;/P&gt;
&lt;P&gt;한국의 역사학자들은 백제인, 가야인이 일본을 지배하였고 일본 천황은 그들의 자식이라고 하고 일본 학자들은 한반도에 임나일본부가 있었다고, 서로 자기가 옳다고 줄기차게 주장하고 있다. 그들은 진실을 짐작하면서도 왜 그렇게 외골수로 고집만 부리고 있는 것일까. &lt;/P&gt;
&lt;P&gt;왜왕국의 실체를 인정하게 되면 한반도 일본부 존재의 논거가 된다. 그래서 한국의 학자들은 그 왕국의 실재를 부정하는 것 같다. 그런데 앞의 왜의 실재를 인정하면 임나일본부 존재의 논거가 되는 데도 일본학자들은 어째서 그것을 인정하려 않고 있는 것일까. 그 이유는 뻔하다. 한반도와 일본에 걸쳐 있는 왜왕국의 실재를 인정하면, 그 실체를 밝혀야만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럼 왜왕국은 원래 일본국이 아니라 한반도 국가이었다는 것이 밝혀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양국의 역사학계에서는 일치하여 한반도와 일본 땅에 걸쳐있는 왜왕국을 인정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적 진실은 결국 밝혀지게 되어 있다.&lt;/P&gt;
&lt;P&gt;왜왕국의 발전 과정에 관해서 살펴보기로 하자. 어느 때인가 북방 민족이 한반도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우수한 문화와 무기를 갖고 있는 그들에게 한반도인들은 순식간에 정복당하고 말았을 것이다. 역사적 기록에 의하면 단군조선이 망한 뒤 왕족이 한반도 남쪽으로 내려가 한(韓)을 세웠다고 한다. 다시 부여(夫餘) 족이 내려와 백제를 세웠다. 신라, 가야(伽倻)도 외래 민족이 세운 것이다. 신라의 경우는 그 후 외래인이 또 들어와 재건한 것으로 보인다. &lt;/P&gt;
&lt;P&gt;신라의 위대한 임금인 법흥왕, 진흥왕은 중국의 북방민족인 선비(鮮卑) 족 모용씨의 사람이었다고 한다. 고구려의 속국에 불과했던 낙후된 국가 신라가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삼국 통일을 완수한 것은 바로 중국 대륙을 주름잡던 선비족의 한 집단에 의하여 우수한 대륙문화가 신라로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실제적으로 증명한 연구 내용이 텔레비전에 방영되고 책으로도 출판되었다고 한다.&lt;/P&gt;
&lt;P&gt;재야 사학가들은 우리 선조가 대륙을 주름잡으며 중국인들에게 호령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앞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사실이 그러하지 않은가. 우리 선조가 대륙을 주름잡았다는 재야 사학가들의 주장이 미친 소리가 아니라 역사적 사실에 맞는 것이 아닌가. 당시 신라에 들어온 집단은 한반도인에 비해서 아주 적은 수였다고 해도 그들은 왕, 귀족이 되었으며 신라의 정신문화를 지배하기까지 했다. 그들은 한반도인의 선조가 되었다. 선비족이 대륙을 주름잡으며 중국인들에게 호령한 역사적 사실은 신라의 모용씨 집단에 의해서 그들의 후손인 한국인들에게 전해졌던 것이다. &lt;/P&gt;
&lt;P&gt;그런데 당시 단군조선과 부여 종족이 한반도로 들어온 것은 ‘게르만 민족 대이동’ 같은 것이 아니라 그저 일개 집단이 들어온 것이었을 뿐이다. 물론 그들은 우수한 문화와 무기로 단번에 왜왕국을 점령할 수가 있었다. ― 기마민족의 한반도와 일본 정복설이 있는데, 사실 일단의 기병대라도 당시 말을 사용하지 않고 있는 낙후된 지역 한반도 왜왕국은 단번에 정복할 수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정복민의 수효라는 것은 피정복민의 수효에 비하면 바닷물에 몇 방울 물 같은 것이었다. 소수의 그들이 다수의 한반도인들을 강압으로만 지배할 수는 없었다.&lt;/P&gt;
&lt;P&gt;한편 왜왕은 북방으로부터 한반도로 무장 집단이 몰려오기 시작하자 부득불 일본 땅으로 피신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왜왕국의 수도는 일본 지역에 위치하게 된다. 왕과 상층부가 대거 일본 땅으로 건너가자 한반도에는 그때 공동(空洞) 현상이 일어났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잠깐의 일이었다. 당시 일본 지역이 더 크고 많은 사람이 살고 있었다고 해도 지정학상 열등한 지역으로 경제력이라는 것은 중국의 일 개 군이 아니라 일 개 현, 한반도의 한 부분지역의 그것에도 미치지 못했다. 그래서 왜왕이 수도를 일본으로 옮긴 후에도 실상은 왜왕실은 한반도 지역 거주인에 의해서 여전히 지배되었을 것이다. 왜왕국은 한반도의 경제력에 의해서 유지되었다. 가야(伽倻)의 일본지역 지배는 그런 맥락에서였을 것이다. 이에 대한 역사적 기록을 밝혀내고 있는 사람들은 학계뿐만이 아니라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일반인 가운데에도 있다. 그에 대한 유물도 한국과 일본에서 발견되고 있다.&lt;/P&gt;
&lt;P&gt;일본고대사에 왜왕이 한반도국가 왕들 위에 군림했다고 나온다. 그런데 그때 일본지역은 후진지역이었다. 일본고대사에 따른다면 창과 칼로 무장한 군대의 왕이 총과 대포로 무장한 군대의 왕들 위에 군림했다는 말이 된다. 그래서 일본학계에서도 일본왕 군림 내용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그러자 한국학계에서는 일본고대사 그 내용은 전설일 뿐이라고 일축하여버렸다. 그러나 동서 어느 국가의 고대사에도 전설적인 내용이 있으며 그 속에 진실이 담겨 있는 법이다. 사실, 그때에 왜왕은 한반도 무력에 의존하여 한반도국가 왕들 위에 군림했던 것이다.&lt;/P&gt;
&lt;P&gt;한반도로 들어온 부여인은 한반도인을 지배하는 방책으로 형식적이나마 왜왕을 받들게 되었을 것이다. 그것은 오늘날 영연방 국가들이 영국 여왕을 받드는 것과 흡사한 것이었다. 사실, 원시적 형태의 국가였던 왜국은 부여(백제)인에 의해서 국가 같은 형태를 처음으로 갖추게 되었을 것이다. &lt;/P&gt;
&lt;P&gt;백제왕이 칠지도를 왜왕에게 바쳤을 수도 있다. 이에 대해서 한국인은 몹시 자존심이 상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칠지도와 광개토왕비의 글자가 일본인에 의해서 날조되었다는 명확한 증거가 나타날 때까지는 일단 현재의 칠지도와 광개토왕비의 글자들을 전제(가정)로나마 수용하는 것이 학문하는 사람으로서의 옳은 태도이다.&lt;/P&gt;
&lt;P&gt;물론 당시의 실상은 백제인이 완전히 왜왕실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에 대해서는 국내외의 연구논문들이 이미 많이 나와 있으며 일본에도 그것을 증명하는 수많은 역사적 기록, 유물(언어, 관습 등 포함)이 있다. 단지, 한국 학자의 그 연구내용 중 일본 천황들이 백제나 가야 왕족의 자식들이라는 부분만이 필자의 견해와 다를 뿐이다.&lt;/P&gt;
&lt;P&gt;백제나 가야가 일본을 지배했으며 그 왕실의 자손이 일본 천황이라는 것을 논증하는 국내의 훌륭한 연구논문들이 많이 있다. 실은 필자의 이 글도 전적으로 그 글들에 의존해 쓰였다. 그런데 그 글들은 구십 퍼센트 옳은데 그 나머지가 그른 것 같다. 물론 어차피 수천 년 전의 일을 다룬 논문들이다. 일본 천황은 가야, 백제의 왕족이라는 가정(假定)을 내릴 수가 있다. 그런데 그 논문들은 가정이 아니라 확실한 결론(結論)으로 하고 있다. 그래서 다른 훌륭한 논거들도 일거에 무너지게 하고 있는 것이다. &lt;/P&gt;
&lt;P&gt;세계 역사학계에서도 그 논문의 본문을 보고 긍정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일본 천황은 가야, 백제 왕족이라고 확실히 결론짓고 있는 것을 보고는 결국 수용하지 못하게 되고 말았을 것이다. 한반도 국가들이 왜왕에게 조공했다는 무수한 역사적 기록들이 있다. 그것들은 모두 전설이거나 날조된 것이라는 한국학자들의 주장을 세계 역사학계에서는 수용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세계 역사학계에서는 일본측 주장에도 논거에 문제가 있는 것을 알면서도 결국 수용하게 되고 말았을 것이다. 이야기를 앞으로 돌리자.&lt;/P&gt;
&lt;P&gt;고대 왜 연방국가, 원시적 형태의 연방국가가 일본과 한반도에 걸쳐서 있었다. 그 후 왜의 한반도 지역 영토는 점점 줄어들다가 삼국시대에는 완전히 소멸된다. 그러나 한반도 남쪽 사람들은 여전히 왜인이라고 불렸으며 왜왕의 한반도 국가들에 대한 영향력은 여전하였다. 이에 관해서는 이미 국내외에 연구논문들이 있으며, 한국과 일본 중국의 역사기록을 살펴보아도 그것을 추정할 수가 있다.&lt;/P&gt;
&lt;P&gt;왜국가연방이 원시적 형태의 연방일 뿐만이 아니라 이익에 따라 연방국가 상호간 반목과 질시가 성행했을 것임은 쉽게 짐작할 수가 있다. 백제가 형식으로 받드는 왜왕도 왜인임에는 틀림없으나 사정변화에 따라 한반도 출신, 일본지역 여자제사장 출신 등으로 여러 차례 바뀌었을 것이다. 그러나 연방 각 국가의 왕실이 취약함에 따라 왜왕은 각 국가에게 실질적인 힘을 행사하기도 하였을 것이다.&lt;/P&gt;
&lt;P&gt;왜왕은 어째서 그토록 오랫동안 한반도국가들에 대한 영향력을 잃지 않았던 것이었을까. 그것은 백제, 신라, 가야 등 한반도국가 왕족들이 외래인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고구려도 남하하여 한반도가 본거지가 됨에 따라 왜왕의 권위를 무시할 수가 없게 되었을 것이다. &lt;/P&gt;
&lt;P&gt;일본 고대사에 오 왕이 나오는데 그들의 사치생활이 고대 페르시아나 로마 제왕들 이상이었다고 기록되어있다. 당시 일본국의 경제력이라는 것은 중국의 일 개 현에 불과했는데 과연 그것이 가능할 수 있었을까. 따라서 그 기록에 일본 학자들조차도 냉소적이다. &lt;/P&gt;
&lt;P&gt;그러나 그것도 역사의 기록인 이상 그렇게 간단히 무시해서는 안 될 것이다. 당시 백제는 동방의 로마제국이었다. 백제의 부는 페르시아, 로마 제국에 버금갔다. 그 백제가 명목상이지만 시종일관 왜왕을 받들고 있었다. 그렇다면 설혹 왜국의 경제력이 보잘 것 없는 것이었다고 해도 왜왕실만은 페르시아나 로마 왕실 못지않은 사치생활을 누리는 것이 가능하지 않았겠는가.&lt;/P&gt;
&lt;P&gt;왜왕이 수나라 황제에게 편지를 보내, 해가 뜨는 나라의 천자가 해가 지는 나라의 천자에게 보내노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그것을 보고 수나라 황제는 다시는 이런 글을 자기 앞에 올리지 말라고 했다고 한다. 그 기록에 의하면 수나라 황제가 그 편지를 보고 분격해(심각해)한다. 만일에 왜국이 일본 땅만의 적은 나라였다면, 그런 글이 중국의 황제에게 올려지고 또 황제가 경제력이 중국의 일 개 현에 불과한 나라의 왕의 미친 소리에 분격해하고 심각해할 것이 과연 있었을까. 따라서, ‘왜는 중국의 일 개 현에 불과한 작은 국력의 나라가 아니라 중국에 버금가는 큰 국력을 갖고 있는 해상왕국 백제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는 나라였으므로 수나라 황제가 왜왕의 그런 편지에 분노하고 심각해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는 주장이 오히려 설득력이 있을 것 같다. &lt;/P&gt;
&lt;P&gt;동방의 로마제국인 해상왕국 백제가 그에 대한 역사적 기록도 제대로 남기지 못하고 순식간에 사라져버린 이유를 추측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렇게 사라져버린 것은 중국이 수(隋), 당(唐) 통일 왕조가 되어 운하를 건설하고 해상을 봉쇄하였기 때문이었다. 백제는 중국에 비해 낙후된 지역, 중국의 한 개 군에 불과한 작은 지역 한반도의 국가이다. 그들이 중국에 버금가는 국력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해상 무역을 통해 중국 경제를 지배했기 때문이었다. 해상이 봉쇄당하면 해상왕국 백제는 순식간에 몰락 할 수밖에 없었다. &lt;/P&gt;
&lt;P&gt;동방의 로마 제국이었던 백제에 관한 기록이 중국역사서에 애매하게만 있게 된 것은 재야 사학가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춘추필법에 의해서만 그러하게 된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 외에, 백제와 신라의 해상을 통한 대륙진출은 국가주도적인 것이 아니라 민간 상인들 중심으로 이루어졌기에 대륙 점거나 활약이 애매한 형태로만 역사서에 남게 되고 동방의 로마제국다운 유적을 남기지 못하게 되고 만 결과를 빗은 것이다. (신라는 쇄국정책을 취했다고 하는 견해가 있는데 이 경우에는 순수민간해양 국가였다.) 중국이 통일 왕조가 되어 해상을 봉쇄하자 절망하고 분격한 사람들은 백제 상인들이었다. 왜왕이 수황제에게 보낸, 조롱하는 언사의 편지는 왜왕실을 실제적으로 지배하고 있던 백제 상인들의 울분의 토로였던 것이다. &lt;/P&gt;
&lt;P&gt;동방의 로마제국이었던 백제에 대해서는 머릿속 상상이 아니라 학술적으로 타당한 연구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해상왕국 백제가 실재했다는 것이 공인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본 글의 전개상 단순한 사견이라도 더 언급해야만 할 것 같다. &lt;/P&gt;
&lt;P&gt;백제의 대륙지배 근거를 다른 차원에서 살펴보도록 하자. 수, 당은 전국력을 투입시켜 생사를 걸고 고구려와 대결하였다. 그런데 고구려는 중국역사에 항상 등장하는 북방민족국가 중의 하나였다. 유독 그 고구려만 멸망시키려고 수, 당이 생사를 걸고 싸움을 벌인 것이 너무 어처구니없게 생각되지 않는가. 수, 당의 목적은 고구려 외에 또 다른 국가가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lt;/P&gt;
&lt;P&gt;그렇다. 백제는 해상을 통해 중국 경제를 지배하고 있었다. 수, 당 왕조가 해상을 봉쇄시켰지만 그런 일이 중앙 정부의 힘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진정으로 해상을 봉쇄하기 위해서는 백제를 멸망시키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당시 백제가 중국대륙을 지배했다고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민간 상인 중심이었으며 한반도의 백제국은 중국의 일개 군에 불과한 보잘 것 없는 군사력의 나라였다. 그러나 수, 당은 해상을 통해 해상왕국 백제와 싸움을 벌일 엄두가 나지 않았다. 백제와 싸움을 벌일 경우 북방의 강국 고구려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그래서 수, 당은 먼저 고구려 공략에 나선 것이었다. &lt;/P&gt;
&lt;P&gt;수나라는 고구려와의 전쟁으로 인하여 멸망하고 말았다. 당나라도 고구려와 대결을 벌였지만 패배하고 말았다. 그런데 기실 고구려는 오히려 별 것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중국과 정면 대결해 승리한 고구려는 당연히 중원으로 진군(進軍)하여야 하는 데 그러지 못한 것이다. 이제 당왕조는 대전(大戰)의 후유증을 치료하여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수왕조처럼 자칫 멸망해버릴 수도 있었다. 그런데 당나라는 수나라가 대전의 후유증을 치료하지 못해 멸망한 것을 직접 눈으로 보고도 다시 존망을 건 모험을 하여 한반도 국가와 싸움을 벌인다. 당나라가 그러한 것은 어리석기 때문이 아니라 그럴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왕조는 백제를 멸망시켜 해상을 봉쇄하지 않으면 존속하기가 어려웠다. 백제가 중국 왕조의 존립에 위협이 되고 있었다는 것은 당대의 인물인 최치원의 말에서도 엿볼 수가 있다. &lt;/P&gt;
&lt;P&gt;고구려는 대륙세력을 피하여 수도를 한반도로 옮겼다. 왕실이 한반도에 뿌리를 내리기 위해서는 왜왕과 화평하게 지내는 것은 필요했다. 그런데 역사적 기록에 의하면 그때 고구려는 왜왕에게 필요 이상으로 예의를 갖춘 것으로 보인다. 그 것은 아마 백제의 권고 때문이었을 것이다. 강력한 군사력의 고구려가 맹주국이었지만 실제 주도적인 나라는 중국해를 지배하고 있는 백제였다. 백제왕실이 아니라 백제 상인들이 동아시아를 지배하고 있었다. &lt;/P&gt;
&lt;P&gt;당왕조는 생사를 걸고 백제와 대결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당은 이번에는 작전을 바꾸어 신라와 동맹을 맺고 바로 백제 공략에 나선다. (대륙의 백제 상인 중 다수가 결국에는 당왕조에 협력하게 된 것으로 추측된다.) 이윽고 백제 공략에 성공하였다. 동방의 로마였던 백제가 어째서 그처럼 쉽게 무너져버리고 말았는지에 대해서 더 살펴보기로 하자.&lt;/P&gt;
&lt;P&gt;백제의 대륙 지배는 어디까지나 민간상인 중심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따라서 국력은 분산적인, 통합이 어려운 것이었다. 군사력도 강한 것이 아니었다. 특히 한반도 내 백제왕조의 군사력은 별 것이 아니었다. 동아시아 지배자는 백제왕실이 아니고 백제상인들이었고 그들의 부는 태반이 중국대륙에 있었다. 또, 그들은 한반도 백제보다는 고구려, 신라 등 강국의 위협이 없는 일본지역에 자신들의 재화를 두기를 선호했을 것이다.&lt;/P&gt;
&lt;P&gt;신라는 그 무렵 법흥왕, 진흥왕 등 영명(英名)한 왕들 덕택으로 막강한 국가가 되어 있었다. 중국이 통일 왕조가 되어 해상을 봉쇄하여 백제의 국력이 쇠약해지게 되자 신라는 백제를 압도하여 동해와 남해의 해상권을 장악한다. 당시 백제의 해군(海軍)은 일본, 중국, 한반도국 삼국의 무사 출신 용병으로 구성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국력이 쇠약해지자 해군력이 급속히 쇠약해지게 되었다. &lt;/P&gt;
&lt;P&gt;백제왕실의 군부대도 삼국의 무사출신 용병집단이 주축이었을 것이다. 계백은 오천 명을 이끌고 김유신의 오만 대군과 정면으로 대결하여 네 차례에 걸쳐 승리한다. 용병집단이 뛰어난 무인들이었기에 그것이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용병집단에게는 애국심이 부족했다. 그래서 결국 애국심에 가득찬 화랑도의 신라군에게 패하게 되고 말았을 것이다. 신라 진흥왕 때는 백제가 국력이 아직 그렇게 쇠약해지지 않았는데도 압도당한 것은 진흥왕의 영도력 외에 양군의 애국심에 큰 차이가 있기 때문이었다. &lt;/P&gt;
&lt;P&gt;북위(北魏)가 수십만 기병을 이끌고 백제를 침공했다는 중국의 역사 기록이 있다. 해상왕국 백제는 대륙에 기반을 둔 국가이기에 한반도의 백제국은 신라와 고구려에 적시에 적절하게 대처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며 중국이 통일왕조로 점차 발전해감에 따라서 국력이 약해지기도 했을 것이다. 변하는 대륙환경으로 인하여 백제 상층부가 동요하여 왕실과 귀족(상인) 간에 또 귀족들 간에 갈등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귀족 중에는 친중국파도 있었을 것이다.) 신라가 그 후 백제 의자왕 군에게 압도당하여 당나라 황제에게 원조를 요청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대륙에 수당 통일 왕조가 서자 대륙의 백제군이 거점을 잃고 한반도로 철수하여 백제군이 일시적으로 강해졌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백제군의 전력은 계속 유지될 수가 없었다.&lt;/P&gt;
&lt;P&gt;한마디로 당시 백제왕조로서는 두 강국의 양면 공격을 막아낼 길이 없었다. 왜 국가 연방은 민간상인 중심의 어설픈 체제로 통합된 군사력을 갖고 있지 않아 외부의 강한 군사력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 백제가 당나라의 침입을 받자 왜왕은 당연히 구원군을 파견하였다. 그러나 왜군이 당군의 상대가 될 수는 없었다.&lt;/P&gt;
&lt;P&gt;당은 이윽고 백제를 멸망시켰다. 그러나 수백 년간 지속된 한반도인의 대륙지배를 그렇게 간단히 종식시킬 수는 없었다. 백제, 고구려 멸망 이후에 동부 중국에는 당왕조와 어깨를 나란히 할 만큼 강국인 한반도계 국가(이정기 왕국)가 세워져 한동안 존속된다. 그 후로도 다시 신라방, 장보고의 해상활동 등 민간상인 중심의 한반도인 대륙지배가 계속된다. (중세에 동아시아를 진동시킨 왜구는 백제인의 후예였다는 국내 연구서가 있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왜를 비류백제로 대치시켜서 가뜩이나 혼미 속에 있는 한국고대사를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다.) &lt;/P&gt;
&lt;P&gt;해상왕국 백제에 대해서 사견이나마 살펴보았다. 다시 한일 고대사 문제로 돌아가기로 하자. &lt;/P&gt;
&lt;P&gt;백제가 망한 뒤 대륙과 한반도의 백제유민들이 대거 일본 땅으로 들어가게 된다. 백제의 문화와 부(富)가 그대로 들어가게 된 셈이다. 이때부터 일본 땅은 급속도로 발전하여 한반도에 의지하지 않는, 독립적 국가다운 경제력을 갖추게 된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국내외의 학자들에 의해서 폭넓게 연구되어 실제적 논거들이 무수히 많이 있다.&lt;/P&gt;
&lt;P&gt;백제가 망한 뒤 통일 신라왕조가 서고 한반도와 일본 땅 간의 유대는 절연된다. 한반도에 이미 뿌리를 내리고 있는 신라왕실은 부여계 백제왕실처럼 왜왕실을 섬길 필요가 없었다. 그보다, 신라는 당과 연합하여 왜군을 격파하고 백제를 멸망시켜 왜 국가 연방을 와해시켰다. 신라왕조가 왜왕을 형식으로나마 받들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을 것이다. 또 백제인들이 사실상 왜국을 지배하였고 그 백제인들은 자신의 나라를 멸망시킨 신라에 대해서 원한이 깊었을 것이다. 당시 신라는 백제를 이은 동방의 로마제국이었다. 일본 지역은 그때서야 발전을 시작한 아직 낙후된 지역이라 신라는 일본에 그렇게 주의를 기울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에 일본 땅과 한반도 간의 유대는 절연되어 양국은 독자적인 국가로 발전하게 되는 것이다.&lt;/P&gt;
&lt;P&gt;물론 오랜 세월 동안 한 몸 같았던 고대 일본국과 한반도국 간의 유대가 그렇게 쉽게 절연될 수는 없었다. 우선 신라는 당군을 한반도에서 몰아내고 한반도인을 통합시켜 진정한 통일을 완수시켜야 하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왜왕의 협조가 필요했다. 왜국은 그때 비약적인 발전을 시작했다고 하지만 그간 워낙 문화, 경제적으로 한반도에 의지하여 지탱하여왔는지라 신라에 의존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래저래 양국의 교류는 계속되었을 것이다. 왜왕국이 신라 공략을 도모하기도 하였을 것이고, 한 때는 신라왕실의 지원을 받는 친신라계가 백제계를 몰아내고 왜왕실을 장악하기도 하였을 것이다.&lt;/P&gt;
&lt;P&gt;백제의 멸망 뒤 단절된 한일간의 관계는 세월이 흘러갈수록 심화되어 망각의 시대로 들어서, 고려시대에 이르러서는 왜왕조는 한국고대사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대신 새로운 한국고대사가 정립하게 된다.&lt;/P&gt;
&lt;P&gt;이야기를 맨 앞으로 돌리자. 이제 한국은 한일간의 고대사 논쟁에서 발상의 전환을 하여야 한다. 우리가 지금 불리한 입장에 있다는 사실을 솔직히 인정하고 전제가 불리한 것이라고 해도 과감하게 수용하며 논쟁에 나서야 한다.&lt;/P&gt;
&lt;P&gt;지금 일본에는 한일간의 고대사 문제를 실제적으로 증명하여 해결할 대량의 유물이 묻혀있다. 일본의 학자들이 천황묘를 발굴하여 고고학적 연구를 하다가 당황하여 다시 묻었다는 이야기도 들려온다. 일본 학자들은 한국학자들이 백제와 가야가 일본을 세웠으며 일본 천황은 백제, 가야 왕실의 자식이라고 주장하는 것에는 여유를 갖고 있는 것처럼도 보인다. 그러나 일본 역사학계에도 밝혀질까 봐 두려워하는 것이 분명히 있다. &lt;/P&gt;
&lt;P&gt;왜왕이 백제, 신라, 가야 등의 한반도 국가들을 속국으로 인정하여 줄 것을 중국의 황제에게 요청했다는 역사적 기록이 있다. 이에 대해서 북한 역사학계에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논문을 발표한 적이 있다. ‘그 당시 일본 지역의 섬 등에 백제, 고구려, 신라 등 한반도 국가의 분국(分國)이 있었다. 왜왕이 요청한 것은 그 분국을 말하는 것이다.’ 그 논문이 발표되자 일본 역사학계에 충격으로 큰 요동이 일어났다고 한다. 실로 우스운 사건이었다. 백제와 신라는 천년왕국이다. 어찌 왜왕이 중국황제에게 일본 지역 작은 섬이나 동네를 일러 백제국, 신라국이라고 했겠는가. &lt;/P&gt;
&lt;P&gt;그런데 일본학계에서는 어째서 북한학계의 ‘한반도 국가의 분국’ 주장에 호들갑을 떨었던 것인가. 혹시, 한국학계에서 올바른 연구를 하여 진실이 밝혀지게 될까 봐 두려워서 그른 방향으로 연구해나가게 하려고 일본학계에서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한국의 학계에서 ‘분국설’, ‘백제가야왕족 일본천황설’, ‘날조설’을 연구하여 발표하면 한편 쾌재를 부르면서 말이다. &lt;/P&gt;
&lt;P&gt;&lt;BR&gt;한일 고대사 연구는 아주 보람 있는 일인 것으로 생각된다. 수천 년 전의 일이니 머릿속 상상으로 하여 연구해나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일본에는 한일 고대사에 관한 실제적 증거물들이 땅 속에나마 대량으로 있다. 언젠가는 그 증거물들이 백일하에 나타나 역사적 진실이 모두 밝혀지게 될 것이다. &lt;/P&gt;
&lt;P&gt;&lt;BR&gt;실제적 증거들이 나타날 때 앞의 필자의 주장은 머릿속 상상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이 될 것이다. 필자의 연구는 보람 있고 값진 일이 아닌가. 물론 실제적 증거들이 나타나 필자의 주장이 전면적으로 부정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경우에도 머릿속 논거들에 의해서 부정되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 증거들에 의해서 부정되는 것이니 역시 보람 있는 일이 되지 않겠는가.&lt;/P&gt;&lt;BR&gt;</description>
			<category>참조글</category>
			<author>(이슬)</author>
			<guid>http://origanalco.info/2</guid>
			<comments>http://origanalco.info/2#entry2comment</comments>
			<pubDate>Tue, 16 Jun 2009 11:32:07 +0900</pubDate>
		</item>
		<item>
			<title>간단한 고구려역사</title>
			<link>http://origanalco.info/3</link>
			<description>&lt;P&gt;고구려 탄생&lt;/P&gt;
&lt;P&gt;고구려는 동부여에서 자랐던 부여의 왕자 주몽 즉 동명성왕께서 세우신 나라입니다. 하백의 딸인 유화...이는 누구라도 처음보면 반할정도로 아름다운 미모를 가졌다합니다. 이때 유화는 다물군대장인 해모수를 연모했고 해모수의 아들을 낳게됩니다. 그가 바로 주몽이며, 유화는 주몽을 부여궁에 금와에게대리고가서 키우게됩니다. 주몽은 부여에서 예씨부인을 아내로 맞아 유리를 낳고 남쪽으로가서 송양에게 활솜씨를보여 합병시키고, 연타발과 소서노의 도움을 입어 졸본지방에 도읍을 정하고 고구려를 세웁니다. 실화에선 소서노는 우태와 결혼하여 온조와 비류를낳는데 우태가 죽자 주몽하고 결혼한거라고합니다. 그래서 당연히 온조를 태자로책봉할줄 알았지만, 부여에서 내려온 유리를 태자로책봉하자 온조는 반란을 일으키지만 유리가 제압합니다. 그리고 소서노와 온조비류형제는 남쪽으로 내려가 온조는 백제를 건국하고, 비류는 인천지방에 세웠지만 기후상불리하여 후에 온조에게 흡수되었지요.&lt;/P&gt;
&lt;P&gt;고구려vs부여&lt;/P&gt;
&lt;P&gt;그리고 고구려 3대왕 대무신왕때 부여와 고구려는 전쟁을 치르게됩니다.&lt;/P&gt;
&lt;P&gt;이때까지 부여의 왕인 대소는 살아있죠. 이때 대무신왕이 대소를 암살하고 부여를 멸망시킵니다. 그렇지만 동부여는 남게되죠.&lt;/P&gt;
&lt;P&gt;&lt;BR&gt;고구려전쟁사&lt;/P&gt;
&lt;P&gt;&lt;BR&gt;고구려 전쟁사는 거의 세계전쟁사에 들만큼 큰 전쟁으로 기록되어있습니다.&lt;/P&gt;
&lt;P&gt;&lt;BR&gt;살수대첩&lt;/P&gt;
&lt;P&gt;먼저 을지문덕장군이 이끈 살수대첩이있는데요, 살수대첩때 을지문덕은 말갈족들과 쫄병들을 이용해서 적들을 살수로 유인한후 살수에서 물먹게해서 몰살시켰다고합니다.&lt;/P&gt;
&lt;P&gt;이때 고구려의 군사는 1만2천이었고 수나라는 30만이었는데 이중 살아나간 수나라 군사는 고작 2700밖에 되지않습니다. 그러니 29만7천3백의 군사를 모조리 죽여버린거죠&lt;/P&gt;
&lt;P&gt;&lt;BR&gt;고구려vs수양제&lt;BR&gt;&amp;nbsp;&lt;/P&gt;
&lt;P&gt;수양제는 책봉하자마자 113만의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공하지만 고구려의군사는 5만이었습니다. 그런데 연태조와 을지문덕에 의해 번번히 밟혔습니다.&lt;/P&gt;
&lt;P&gt;그후로도 몇십만의 대군으로 고구려를 침공햇지만 을지문덕과 연태조에 의해 번번히 당하고말았죠.그리고 고구려에의해 국력이 콩알만해진 수나라는 남쪽당나라&lt;/P&gt;
&lt;P&gt;에의해 망하고말았죠.&lt;BR&gt;&amp;nbsp;&lt;/P&gt;
&lt;P&gt;고구려vs당나라 전쟁 [이때 당태종은 중국최고의 황제입니다.]&lt;/P&gt;
&lt;P&gt;고구려와 당나라 전쟁을 대표하는 전쟁이라고하면 바로 안시성전투입니다.&lt;/P&gt;
&lt;P&gt;안시성전투의 성주인 양만춘은 연개소문과 친구사이로 연개소문과 양만춘이 같이 안시성전투를 이끌었습니다. 이때 고구려의 군사는 4만이었지만 당나라의군사는 100만가량이었습니다. 연개소문은 저들이 식량이 떨어질때를 노려 최대한 시간을 끌었습니다. 그리고 안시성에서 수십일간의 전쟁이벌여집니다. 전쟁내용은 안시성은 지형상 꾸불꾸불해서 저들의 신무기인 포거를 보완할수있다는걸 이용하여 연개소문은 종점을 이곳으로 잡은점도있지만 보급로이기에 당나라군사를모두 안시성으로 몰아서 한번에 치기로 맘먹은것이었지요. &lt;/P&gt;
&lt;P&gt;고구려군사는 기름과불화살을 이용해 당나라를 공격하고, 당나라는 자꾸 패배를 거듭하자 토산을 쌓기로 마음 먹습니다. 토산을 쌓아서 포거로 공격하자는 심중이였지요. 그리하여&lt;/P&gt;
&lt;P&gt;양만춘은 자꾸 그 토산을 무너트렸지만 저들은 결국 다완성하여 안시성에 포거로 마구 공격을합니다. 이때 연개소문과 양만춘은 몰래뺏어놓은 포거로 토산의 약점인 지반을 공격하여 저들에게 혼란을 가하고 이때 토산을 점령하여 당나라의패배로 돌아갑니다. 때마침 9월이라 저들은 춥고 배고파서 사기가 하락할대로하락해버립니다. 결국 당나라최고 황제 이세민은 후퇴하게 되죠. 그런데 가다가 양만춘의 화살에 눈을 맞고 눈한쪽을 잃게됩니다. 그런데도 후에 양만춘에게 비단100필을 보냈다고하네요.&lt;/P&gt;
&lt;P&gt;멸망&lt;/P&gt;
&lt;P&gt;나.당연합군에의해 멸망하지만... 사실 이들둘이 공격해도 고구려는 잘방어하고 있었습니다. 근본적으론 내란때문에 멸망햇다고봐야겠죠..&lt;/P&gt;
&lt;P&gt;연개소문이 고구려에 암운을 들이올자란건, 김춘추를 살려보내 나당동맹이 성립되서인것같습니다.&lt;/P&gt;&lt;BR&gt;</description>
			<category>삼국시대</category>
			<category>간단한 고구려역사</category>
			<author>(이슬)</author>
			<guid>http://origanalco.info/3</guid>
			<comments>http://origanalco.info/3#entry3comment</comments>
			<pubDate>Tue, 16 Jun 2009 11:32:00 +0900</pubDate>
		</item>
		<item>
			<title>한국고대사회</title>
			<link>http://origanalco.info/1</link>
			<description>&lt;P&gt;한국 고대사회 형성 &lt;/P&gt;
&lt;P&gt;선사 &lt;/P&gt;
&lt;P&gt;구석기:250만년전 ~１만년전[전기, 중기(10만~3만년전), 후기(3,4만~1만년전) &lt;/P&gt;
&lt;P&gt;신석기:B.C5000 ~ B.C1000 &lt;/P&gt;
&lt;P&gt;구석기 한대유적은 수로, 즉 강가 특히 물줄기 합류지점을 중심으로 분포하고 있으며, 동굴유적은 동굴 입구 보통 평지보다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동남 또는 남쪽에 입구가 있다. &lt;/P&gt;
&lt;P&gt;구석기에서 농경혁명(신석기 혁명:culture 문화 - cultur 농사짓다)이 일어나면서 문화가 발달. 이에 따른 변화로 주거지, 토기, 마제석기, 옷(직조기술)이 등장했다. &lt;/P&gt;
&lt;P&gt;※기본적으로 알아야 할 것들... &lt;/P&gt;
&lt;P&gt;&lt;BR&gt;고조선 개요 &lt;/P&gt;
&lt;P&gt;우리나라 역사에 처음보이는 국가로 삼국유사에 기술되어 있다. 물론 신화적인 요소가 많으므로 있는 그대로를 믿을 수는 없고 해석이 필요하다. 삼국사기에는 특별히 고조선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신라본기 제1 ‘시조 혁거세 거서간조’에 보면 ‘先是 朝鮮遺民 分居山谷之間 ...’ (이에 앞서 조선의 유민이 산곡사이에 분거하여...)라는 기록으로 볼때 그 역시도 조선의 실체를 인정하고 있다. &lt;/P&gt;
&lt;P&gt;고조선에 대한 연구는 현재 우리나라의 사료로는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어(→남아있는 자료도 위서 소지가 있어 연구가 되지 않고 있다.) 어려움이 많다. 고조선 당시의 중국기록(→사마천의 ‘사기’등)을 토대로 연구가 활발하나, 이 역시 자신들의 기록 아닌 탓에 그 내용이 적어 고고학적인 연구가 많이 필요한 상태다. &lt;/P&gt;
&lt;P&gt;고조선의 실 건국연대는 기원전 12세기를 전후한 시기(중국의 은, 주 교체기)라는 설이 일반적이며, 삼국유사의 기원전2333년의 기록은 실제라고 볼 수 없고 역사의 유구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리고 늦어도 기원전4세기경에는 고대국가로 성장했다고 할 수 있다. &lt;/P&gt;
&lt;P&gt;고조선문명을 대표하는 유물로는 지석묘(고인돌)와 석관묘, 비파형 청동단검, 미송리형 토기를 들 수 있다. 이러한 유물들은 고조선의 세력권을 말해주는 대표적인 유물이다. 이로써 추정한 고조선의 강역은 확실치 않으나, 전성기에는 대릉하 서쪽에서부터 요하유역과 요동반도, 평안도 지역에 이르는 곳이다. &lt;/P&gt;
&lt;P&gt;기원전 3세기 연나라 진개의 침입으로 영토가 많이 축소되었지만, 漢의 등장(기원전206년) 시기에 다시 영토를 확장하는 등 변화가 많았다. 중심지도 요동 혹은 요서에서 한반도로 옮긴 것으로 보고 있다. &lt;/P&gt;
&lt;P&gt;전국시대 연나라와 대립할 정도로 강력한 군사력과 발전된 경제, 정치체제를 갖춘 국가였다. 10세기 이상 존속해왔다는 것은 그 만큼 국가적인 역량이 뛰어났음을 보여준다. &lt;/P&gt;
&lt;P&gt;고조선은 漢과 동방의 소국의 사이에서 중계무역을 독점하며 부를 축적했고, 주변의 소국을통제할 군사적인 힘을 갖고 있었기에 漢에는 위협적인 세력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漢은 고조선을 공격하게 되었고, 기원전108년에 멸망하였다. 漢과의 전쟁에서 강력한 군사력으로 선전하지만 결국 내부의 배신에 의해 왕검성이 함락됨으로써 동방문명과 중원문명의 첫대결에서 패배하였다. &lt;/P&gt;&lt;BR&gt;
&lt;P&gt;이번 고조선 같은 경우는 선사의 문명과 같은 것으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동방문화권의 국가로 이해해야한다. 국가라고 하는 것은 일정한 정치, 경제, 군사적으로 체계를 갖추고 있으며, 사람이 살아가는 틀이 생겼다는 것이다. 이러한 것을 알고 다각적인 시각으로 고조선을 연구할 필요성이 있는 것이다. 왕에서 일반인, 중심에서 지방에 이르는 다양한 문화적인 역량을 연구하는 것이다. &lt;/P&gt;
&lt;P&gt;일반인들에게는 아직도 고조선이 신화와 같이 인식되고 있으며, ‘고조선은 그냥 단군신화에 나오는 나라야!’라고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분명히 천년에 걸쳐 발전해온 나라라는 사실은 틀림없다. 그것은 사료와 고고학적인 근거도 충분하다. 어떻게 일반인들에 원시인이 아닌 고려나 조선과 같은 하나의 국가였다는 것을 알리는 것은 연구자들이 해야할 일중에 하나일 것이다. &lt;/P&gt;
&lt;P&gt;고대국가 였다고 해서 멀게 느끼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 로마의 경우에 우리의 느낌은 어떤가...? 한번 생각해보아야 한다. &lt;/P&gt;</description>
			<category>고조선</category>
			<category>한국고대사회</category>
			<author>(이슬)</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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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ue, 16 Jun 2009 11:31:53 +0900</pubDate>
		</item>
		<item>
			<title>대무신왕과 바람의나라</title>
			<link>http://origanalco.info/4</link>
			<description>&lt;P&gt;요즘 유행하는 바람의 나라 대무신왕이야기가 있는 참조해요..ㅎㅎ&lt;BR&gt;&lt;BR&gt;[고구려 계보]&lt;/P&gt;
&lt;P&gt;동명성왕(東明聖王, B.C 58~B.C 19) &lt;/P&gt;
&lt;P&gt;→ 유리왕(榴璃, ?~18) &lt;/P&gt;
&lt;P&gt;→ 대무신왕(大武神, 4~44) &lt;/P&gt;
&lt;P&gt;→ 민중왕(閔中, ?~48)&lt;/P&gt;
&lt;P&gt;→ 모본왕(慕本, ?~53) &lt;/P&gt;
&lt;P&gt;→ 국조왕(國祖, 47~165) &lt;/P&gt;
&lt;P&gt;→ 차대왕(次大, 71~165) &lt;/P&gt;
&lt;P&gt;→ 신대왕(新大, 89~179) &lt;/P&gt;
&lt;P&gt;→ 고국천왕(故國川, ?~197) &lt;/P&gt;
&lt;P&gt;→ 산상왕(山上, ?) &lt;/P&gt;
&lt;P&gt;→ 동천왕(東川, ?~248) &lt;/P&gt;
&lt;P&gt;→ 중천왕(中川, ?~270) &lt;/P&gt;
&lt;P&gt;→ 서천왕(西川, ?~292) &lt;/P&gt;
&lt;P&gt;→ 봉상왕(烽上, ?~300) &lt;/P&gt;
&lt;P&gt;→ 미천왕(美川, ?~331) &lt;/P&gt;
&lt;P&gt;→ 고국원왕(故國原, ?~371) &lt;/P&gt;
&lt;P&gt;→ 소수림왕(小獸林, ?) &lt;/P&gt;
&lt;P&gt;→ 고국양왕(故國壤, ?~391) &lt;/P&gt;
&lt;P&gt;→ 광개토대왕(廣開土, 374~413) &lt;/P&gt;
&lt;P&gt;→ 장수왕(長壽, 394~490) &lt;/P&gt;
&lt;P&gt;→ 문자명왕(文咨明, ?~519) &lt;/P&gt;
&lt;P&gt;→ 안장왕(安藏, ?~531) &lt;/P&gt;
&lt;P&gt;→ 안원왕(安原, ?) &lt;/P&gt;
&lt;P&gt;→ 양원왕(陽原, ?~559) &lt;/P&gt;
&lt;P&gt;→ 평원왕(平原, ?~590) &lt;/P&gt;
&lt;P&gt;→ 영양왕(瓔陽, ?~618) &lt;/P&gt;
&lt;P&gt;→ 영류왕(榮留, ?~641) &lt;/P&gt;
&lt;P&gt;→ 보장왕(寶藏, ?~681)&lt;/P&gt;&lt;BR&gt;
&lt;P&gt;[무휼(대무신왕)]&lt;/P&gt;&lt;BR&gt;
&lt;P&gt;대무신왕은 유리명왕의 셋째 아들로 다물후 송양의 딸 송씨의 소생이다. 당시 유리명왕은 아들이 6명이나 있었으나, 첫째인 도절은 유리명왕과 갈등을 빚어 자살하였고, 둘째인 해명은 황룡국왕이 선물한 활을 부러뜨린 일로 자살하였다. 그리하여 셋째인 무휼이 왕위를 이어받게 된다.&lt;/P&gt;
&lt;P&gt;어렸을 때부터 신동으로 불릴 만큼 총명했던 대무신왕은 불과 10살이 되던 해인 서기 13년 11월에 동부여의 침략으로부터 고구려를 지켜냈다고 한다. 이때 무휼은 적군을 산골 깊숙이 끌어들여 골짜기에 그들을 가두어놓고 기습전을 펼치는 계책을 내놓았다고 한다. 그리고 이듬해인 서기 14년 11살 되던 해에는 태자에 책봉되어 유리명왕을 대신하여 국정에 관한 일을 도맡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로부터 4년 뒤인 서기 18년 10월에 서거한 유리명왕의 뒤를 이어 15살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른다.&lt;/P&gt;
&lt;P&gt;&lt;BR&gt;[동부여와의 전쟁]&lt;BR&gt;대무신왕이 왕위에 올랐을 무렵 중국 대륙에서는 민란이 한창 일어나고 있었다. 신나라 정권에 실망한 백성들이 참다못해 일제히 반기를 든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산둥 지방의 번숭이 일으킨 적미의 난과 녹림산에서 왕광과 왕봉이 일으킨 녹림의 난이었다.&lt;/P&gt;
&lt;P&gt;이러한 혼란기를 틈타 대무신왕은 대대적인 팽창정책을 실시했다. 한나라의 붕괴와 한나라를 멸망시킨 신나라의 몰락은 곧 북방의 맹주를 자처하던 고구려와 부여에게는 영토 확장의 기회였던 것이다.&lt;/P&gt;
&lt;P&gt;서기 20년 10월, 동부여의 대소왕은 대무신왕에게 몸은 둘인데 머리는 하나인 붉은 까마귀를 보내며 사신을 통해 “까마귀는 검은 법인데 이제 빛이 변하여 붉게 되었고, 또한 머리는 하나인데 몸이 둘이니, 이는 두 나라가 병합될 징조이다.”라고 전하며, 고구려를 합병시키겠다는 노골적인 선전포고를 하였다. 이에 대무신왕은 “검은색은 북방의 색인데, 이제 변하여 남방의 색이 되었다. 또한 붉은 까마귀는 상서로운 것으로 그대가 이것을 얻었으나 가지지 못하고 내게 보냈으니 양국의 존망은 알 길이 없도다.”라며 까마귀에 대한 해석을 달리하여 대소왕에게 전하였다. 사신을 통해 이러한 해석을 전해 들은 대소왕은 곧 후회하였다고 한다. 서기 21년 12월 대무신왕은 오랜 준비 끝에 부여 정벌을 감행하였으며, 이듬해 2월 9척 장신의 고구려의 장수인 괴유가 대소왕을 죽였다.&lt;/P&gt;
&lt;P&gt;왕의 전사 소식에 동부여는 발칵 뒤집혀졌다. 백성들은 모두들 두려움에 떨었으며, 왕위 다툼에서 밀려난 대소의 막내 동생은 부여를 탈출하여 압록곡 부근에 갈사부여를 세웠다. 또한 그해 7월에는 대소왕의 사촌동생이 백성 1만여 명을 데리고 고구려에 귀순하였다.&lt;/P&gt;&lt;BR&gt;
&lt;P&gt;[한나라와의 전쟁]&lt;/P&gt;&lt;BR&gt;
&lt;P&gt;이 무렵 중국 대륙에서는 한나라 왕조의 후예인 유연과 유수 형제가 한나라 재건을 기치로 내세우고 신나라와 격돌하였다. 그리고 이듬해인 서기 23년에 마침내 왕망을 제거하였고, 2년 뒤인 서기 25년에 유연의 동생 유수가 등극하니 그가 바로 후한의 광무제다.&lt;/P&gt;
&lt;P&gt;이처럼 중국 대륙이 급격한 변화를 겪는 동안 고구려는 내부적으로는 관제를 정비하고 바깥으로는 왕이 몸소 전장에 나서서 꾸준히 팽창정책을 지속하여 26년 10월 개마국을 복속시키고, 같은 해 12월에는 구다국을 복속시킨다.&lt;/P&gt;
&lt;P&gt;28년 7월 한나라의 요동 태수가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를 침략했다. 한나라의 요동군이 위나암을 향해 진격해오자, 고구려는 수성전으로 맞섰다. 하지만 요동군은 위나암성을 에워싸고 장기전 태세를 갖추었으며, 이에 고구려군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이때 좌보로 있던 을두지는 요동군이 암벽성인 위나암성 안의 물이 고갈되기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연못에서 잉어를 잡아 적장에게 보냈다. 그러자 적장은 성 안에 물이 있으니 단시일 안에 점령하는 게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퇴각하였다.&lt;/P&gt;
&lt;P&gt;&lt;BR&gt;[낙랑 정복과 말년]&lt;BR&gt;을두지의 계책 덕택에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한 고구려는 그 이후로도 계속 팽창정책을 실시하여 낙랑을 정복하였다. 낙랑 정복에 가장 큰 공을 세운 사람은 대무신왕의 둘째 아들인 호동왕자였다. 호동왕자는 낙랑 정복을 위해 낙랑의 왕 최리의 딸과 결혼하면서까지 철저하게 정복야욕을 숨기기까지 했다. 그러나 호동왕자는 살아 생전에 낙랑을 정복하지 못하였다. 32년 대무신왕의 첫째 왕후의 계략에 걸린 그는 어머니를 간통했다는 누명을 받았으며, 결국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자살로 생을 마감하였다. 그로부터 5년 후에 대무신왕은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하여 낙랑을 정복하였다.&lt;/P&gt;
&lt;P&gt;이에 후한에서는 옛 한사군 지역인 낙랑이 원래 자신들의 땅이었다고 주장하면서 고구려에게 반환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고구려가 이에 응하지 않자 후한은 44년에 바다를 통해 낙랑 지역에 병력을 투입하였고, 이에 밀린 고구려는 낙랑을 후한에게 뺏기고 만다. 이 사건 이후 살수 이남은 후한에 속하게 되었다.&lt;/P&gt;
&lt;P&gt;44년 10월 대무신왕은 향년 41살의 나이에 서거하였다. 그의 첫째 아내는 모본왕의 어머니이며, 둘째 아내는 갈사왕의 손녀 해씨로 호동왕자의 어머니이다.&lt;BR&gt;&lt;BR&gt;tPxscO63eXd5NXw5aMbd10Oh9a6iPQmw5qxsjCpgkSA=&lt;BR&gt;&lt;/P&gt;</description>
			<category>참조글</category>
			<category>대무신왕과 바람의나라</category>
			<author>(이슬)</author>
			<guid>http://origanalco.info/4</guid>
			<comments>http://origanalco.info/4#entry4comment</comments>
			<pubDate>Tue, 16 Jun 2009 11:31:44 +0900</pubDate>
		</item>
		<item>
			<title>고려역사</title>
			<link>http://origanalco.info/5</link>
			<description>&lt;P&gt;918. 왕건, 고려를 건국. 궁예, 피살당함.&lt;/P&gt;
&lt;P&gt;919. 도읍을 송악(개경)으로 천도.&lt;/P&gt;
&lt;P&gt;935. 견훤, 고려로 귀순.&lt;/P&gt;
&lt;P&gt;936. 고려, 후백제를 점령하여 후삼국 통일.&lt;/P&gt;
&lt;P&gt;942. 거란의 사신을 귀양 보내고 그들이 가져온 낙타를 굶겨 죽임.&lt;/P&gt;
&lt;P&gt;943. 고려 태조 왕건, &#039;훈요십조&#039;를 반포하고 사망.&lt;/P&gt;
&lt;P&gt;956. 노비안검법 실시.&lt;/P&gt;
&lt;P&gt;960. 쌍기의 건의로 과거제 실시.&lt;/P&gt;
&lt;P&gt;976. 전시과 실시.&lt;/P&gt;
&lt;P&gt;981. 연등회·팔관회 폐지.&lt;/P&gt;
&lt;P&gt;982. 최승로, 성종에게 &#039;시무이십팔조&#039; 올림.&lt;/P&gt;
&lt;P&gt;986. 의창 설치.&lt;/P&gt;
&lt;P&gt;987. 노비환천법 실시.&lt;/P&gt;
&lt;P&gt;992. 국자감 설립.&lt;/P&gt;
&lt;P&gt;993. 서희, 거란의 소손녕과 담판하여 가란군 철수 시킴.&lt;/P&gt;
&lt;P&gt;996. 서희, 강동 6주 개척.&lt;/P&gt;
&lt;P&gt;1009. 김치양이 난을 시도했으나 강조의 정벌로 실패. 강조, 목종을 시해하고 현종을 왕위에 올림.&lt;/P&gt;
&lt;P&gt;1010. 연등회·팔관회 부활.&lt;/P&gt;
&lt;P&gt;1011. 거란의 침입으로 개경 잠시 함락.&lt;/P&gt;
&lt;P&gt;1018. 강감찬·강민첨, 거란의 소배압의 침입을 흥화진에서 격퇴.&lt;/P&gt;
&lt;P&gt;1019. 강감찬, 귀주에서 거란군 섬멸(귀주대첩).&lt;/P&gt;
&lt;P&gt;1020. 거란과 강화.&lt;/P&gt;
&lt;P&gt;1053. 해동공자라 불리던 최충에게 문종이 궤장을 하사.&lt;/P&gt;
&lt;P&gt;1065. 문종의 넷째 왕자인 후(의천), 승려로 출가.&lt;/P&gt;
&lt;P&gt;1068. 최충, 사망.&lt;/P&gt;
&lt;P&gt;1086. 의천, 송에서 서적 1천 권 반입. 교장도감에서 4천 7백여 권 간행.&lt;/P&gt;
&lt;P&gt;1097. 해동통보 발행.&lt;/P&gt;
&lt;P&gt;1101. 대각국사 의천, 입적(사망).&lt;/P&gt;
&lt;P&gt;1104. 윤관, 별무반 설치.&lt;/P&gt;
&lt;P&gt;1108. 윤관, 별무반을 이끌고 9성 축조.&lt;/P&gt;
&lt;P&gt;1112. 혜민국 설치.&lt;/P&gt;
&lt;P&gt;1126. 이자겸이 난을 일으켰으나 척준경의 정벌로 실패하여 귀양감.&lt;/P&gt;
&lt;P&gt;1135. 묘청이 난이 일으켰으나 실패하여 서경파였던 정지상·백수한 등을 처형.&lt;/P&gt;
&lt;P&gt;1145. 김부식, 「삼국사기」 편찬.&lt;/P&gt;
&lt;P&gt;1170. 정중부·이의방 등의 무신의 난 발생. 정중부의 집권.&lt;/P&gt;
&lt;P&gt;1176. 망이·망소이의 난 발생.&lt;/P&gt;
&lt;P&gt;1179. 경대승, 정중부를 살해하고 도방 설치.&lt;/P&gt;
&lt;P&gt;1183. 경대승이 사망하자 이의민 집권.&lt;/P&gt;
&lt;P&gt;1196. 최충헌, 이의민을 살해하고 &#039;봉사십조&#039;를 명종에게 올림. 최씨 무신정권 시작.&lt;/P&gt;
&lt;P&gt;1198. 만적, 노비를 모아 난을 일으킴.&lt;/P&gt;
&lt;P&gt;1200. 최충헌, 자택에 도방을 설치하고 무단정치 시행.&lt;/P&gt;
&lt;P&gt;1211. 최충헌, 희종을 폐하고 강종 옹립.&lt;/P&gt;
&lt;P&gt;1216. 거란의 침입으로 묘향산 보현사 전소.&lt;/P&gt;
&lt;P&gt;1217. 흥왕사의 승려들의 최충헌 암살 기도 실패. 김취려, 거란군 격퇴.&lt;/P&gt;
&lt;P&gt;1219. 최충헌이 사망하자 아들 최우가 집권.&lt;/P&gt;
&lt;P&gt;1225. 최우, 자택에 정방을 설치하고 무단정치 시행. 몽골 사신 저고여가 귀국 도중 피살.&lt;/P&gt;
&lt;P&gt;1230. 저고여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물어 몽골의 침략.&lt;/P&gt;
&lt;P&gt;1232. 도읍을 강화로 옮기고 몽골과 항쟁 시작. 김윤후, 처인성에서 몽골의 적장 살리타이 사살.&lt;/P&gt;
&lt;P&gt;1234.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 발명.&lt;/P&gt;
&lt;P&gt;1236. 강화에서 대장경 제작.&lt;/P&gt;
&lt;P&gt;1238. 몽골의 침입으로 황룡사 9층탑 소실.&lt;/P&gt;
&lt;P&gt;1249. 최우가 사망하자 아들 최항이 집권.&lt;/P&gt;
&lt;P&gt;1251. 8만 대장경 왕성.&lt;/P&gt;
&lt;P&gt;1258. 최씨 무신정권 몰락.&lt;/P&gt;
&lt;P&gt;1270. 개경 환도. 배중손, 삼별초를 거느리고 몽골과 항전.&lt;/P&gt;
&lt;P&gt;1274. 김방경, 원(몽골)의 연합군과 일본 공격을 시하였으나 시도하였으나 실패.&lt;/P&gt;
&lt;P&gt;1281. 고려와 원이 2차 일본 공략 실패.&lt;/P&gt;
&lt;P&gt;1285. 일연, 「삼국유사」 편찬.&lt;/P&gt;
&lt;P&gt;1287. 이승휴 「제왕운기」 편찬.&lt;/P&gt;
&lt;P&gt;1290. 동녕부 폐지.&lt;/P&gt;
&lt;P&gt;1297. 정방 폐지.&lt;/P&gt;
&lt;P&gt;1304. 안향에 의해 주자학 전래.&lt;/P&gt;
&lt;P&gt;1326. 민지, 「편년강목」 편찬.&lt;/P&gt;
&lt;P&gt;1336. 공신전을 원래 주인에게 반환.&lt;/P&gt;
&lt;P&gt;1340. 고려 여인 기황후, 원순제의 제2황후에 책봉.&lt;/P&gt;
&lt;P&gt;1348. 고려가요 「동동」, 「가시리」, 「청산별곡」 등이 유행.&lt;/P&gt;
&lt;P&gt;1352. 공민왕, 몽골풍을 폐지하며 원에 대한 자주정책 실시.&lt;/P&gt;
&lt;P&gt;1356. 공민왕, 누이동생 기황후를 믿고 전횡을 일삼는 기철을 살해. 쌍성총관부 폐지.&lt;/P&gt;
&lt;P&gt;1359. 홍건적이 침입하여 서경을 함락했으나 이듬해 탈환.&lt;/P&gt;
&lt;P&gt;1361. 이 무렵부터 최영과 이성계가 두각을 나타냄.&lt;/P&gt;
&lt;P&gt;1363. 문익점, 목화씨 전래.&lt;/P&gt;
&lt;P&gt;1365. 공민왕, 신돈과 함께 전민변정도감 설치.&lt;/P&gt;
&lt;P&gt;1371. 신돈, 역모혐의로 처형.&lt;/P&gt;
&lt;P&gt;1377. 이성계, 왜구를 지리산에서 격퇴.&lt;/P&gt;
&lt;P&gt;1384. 최영, 문하시중으로 임명. 이성계, 수문하시중으로 임명.&lt;/P&gt;
&lt;P&gt;1388. 최영, 팔도도통사가 되어 조민수와 이성계를 각각 좌군도통사와 우군도통사로 임명하여 요동을 정벌하려 하였으나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으로 실패하고 개경으로 밀려온 이성계군과 싸웠으나 패하여 처형. 이성계, 우왕을 폐하고 창왕 옹립.&lt;/P&gt;
&lt;P&gt;1389. 박위, 쓰시마 정벌. 이성계,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 옹립.&lt;/P&gt;
&lt;P&gt;1392. 이방원, 정몽주 살해. 이성계, 수창궁에서 임금으로 즉위.&lt;/P&gt;
&lt;P&gt;1393. 국호를 고려에서 조선이라 개칭.&lt;/P&gt;</description>
			<category>고려시대</category>
			<category>고려역사</category>
			<author>(이슬)</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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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ue, 16 Jun 2009 11:31:37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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